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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대한민국이 인터넷 강국이 될 수 있까?
    취약점 진단 가이드/IT 뉴스 2020. 10. 20.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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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영향력 있는 IT기업들

    오늘은 우리 일상 속에서 인터넷이라는 소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롭고 편리하게 아무런 제약 없이 사용을 할 수 있는 인터넷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이 인터넷의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는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뻔한 수없이 많은 갈등과 긴장 그리고 경쟁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냉전이라고 부릅니다. 

    즉, 무기를 들고 싸운다는 의미의 전쟁인 열전과 다르게 주축 국가의 군대가 직접 서로 충돌하지 않고, 각 세력 간의 군사 동맹, 재래식 군대의 전략적 배치, 첩보전 그리고 우주 진출과 같은 기술 개발 경쟁의 양상을 보이며 서로 대립했던 것입니다.

    이때 미국은 소련의 핵미사일과 각종 기술 개발에 안보의 위기를 느끼게 되면서 핵전쟁 등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네트워크 개발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국 국방부 산하의 고등 연구국 ARPA가 세계 최초의 패킷 스위칭 네트워크인 아파넷(ARPANET) 개발에 성공을 하게 됩니다.

    현재 이는 우리가 컴퓨터를 사용할 때 익스플로어의 아이콘 모형인 인터넷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형 IT기업의 대표주자

    그리고 69년 10월 29일 스탠퍼드 연구소가 이 아파넷을 활용하여 UCLA에 메시지를 전송하게 되면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컴퓨터가 다른 컴퓨터에게 대화를 할 수 있는 현상을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미국은 세계 최초로 인터넷 개발에 성공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미국이 IT의 선두국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지 미국에서는 자본과 기술력 심지어 훌륭한 인재풀도 충분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맘만 먹게 된다면 개발을 할 수 있었고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이끌기에는 약한 면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인터넷의 강국과 빠른 5G 기술을 선보이며 인터넷 강국이 될 수 있었던 큰 이유를 설명하기 전까지의 서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 다음으로 인터넷을 개발한 국가가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알면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게 됩니다.

    한국형 IT기업의 대표주자

    왜냐하면 당시 대한민국은 1인당 GDP가 2000달러 수준이었고, 개발도상국의 수준의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재 아프리카의 가나와 콩고 같은 개발도상국을 생각하면 비슷한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6.25 전쟁 후 폐허가 된 대한민국이 어떻게 인터넷만큼은 미국과 견주면서 인터넷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70년에 정답이 있었습니다.

    2018년 세계은행에서 제공한 각 국가의 GDP와 GNI 소개

     

    모두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민간 위주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보다는 그 당시에 경제발전을 통해 중화학 공업과 제조업 수출까지 컴퓨터 개발 역시 정부가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력과 인재들로는 컴퓨터의 개발까지는 무리였습니다.

    국내로 들어와서 연구 개발을 할 사람을 찾았지만, 선뜻 나서는 이도 없었고 이때 한국에 들어와 인터넷을 만드는 핵심적인 역할이 바로 재일교포 출신의 전길남 박사입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인터넷 보급 프로젝트를 시작한 전길남 박사

    전길남 박사는 1943년 일본 오사카 출생으로 오사카 대학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UCLA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링 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미국 록웰 인터내셔널에서 컴퓨터 시스템 디자이너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정부가 추진한 해외 과학자 유치 사업에 초청되어 79년에 한국에 귀국을 하게 되고 한국 전자 기술연구소 컴퓨터 시스템 개발 부장 역할을 역임하게 됩니다. 

    사실 처음에 전길남 박사가 맡은 역할은 수출 가능한 컴퓨터 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낙후된 상황에 처해있던 대한민국이었고 그 상황 속에서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외화를 벌 수 있는 컴퓨터 개발도 중요하지만 더욱 큰 크림을 보며 네트워크의 구축을 통해 사람과 사람의 소통을 할 수 있는 망을 만드는 것이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목표는 인터넷망을 구축하여 전 세계적으로 배포하는 일

    하지만 당장 돈이 될 수 없는 분야였고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일 조차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이에 따라 1980년 한국 최초의 컴퓨터 네트워크 개발 제안서가 상공부에 제출이 되었지만 경제개발이 우선인 당시의 상황으로 컴퓨터 네트워크 개발은 비주류에 속해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길남 박사는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고 최초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컴퓨터 네트워킹에 관련된 교과목을 신설시키고 1981년 컴퓨터 연구 개발 국책 제안서의 일부에 네트워크 개발 제안서 수정본을 포함시키면서 결국 컴퓨터 개발과 함께 네트워크 연구도 진행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르고 서울대학교와 구미의 한국 전자 기술연구소 사이에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고 최초로 컴퓨터끼리의 교신이 이루어지는 성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최초로 서울과 구미 간의 네트워크 교신 성공

    엄청난 노력 끝에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인터넷 연결에 성공한 국가가 되었고 성과는 고스란히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인터넷이라는 기술 자체는 국방의 군사기술로 취급이 되어 매우 폐쇄적인 면에서 미국과 동맹을 맺은 NATO의 일부 국가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인터넷 교신을 끝으로 하지 않고 미국과의 교신을 위해 미국의 라우터를 수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거절하게 되고 대한민국은 자체적으로 컴퓨터 개발자들과 함께 라우터 기술을 소프트웨어적으로 구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부 국가만 사용하던 인터넷망을 전 세계에 공개하도록 한 계기가 되었고 대한민국을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공용망이 생성될 수 있는 시작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아시아 최초 원거리 교신 성공을 한 대한민국

    이후에도 대한민국은 인터넷 강국으로써 유지를 하기 위한 후배 양성에도 엄청나게 힘을 쓰게 되는데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넥슨의 창업주 김정주 대표,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를 개발한 송재경, 최초의 인터넷 회사를 만든 허진호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다양한 IT 문화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길남 박사의 제자이자 IT기업 발전에 공헌한 인물들

    대한민국의 IT 문화는 엄청나게 다양화되었고 금융, 게임, 제조, 서비스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PS. 포스팅의 내용은 제 기준으로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참고해서 보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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